[벽강의 땅따라 물따라] 붉은 무덤(赤塚)과 푸른 무덤(靑塚)

news@segyelocal.com | 2021-12-17 08:54:33
▲최영장군 묘(적총) ⓒ벽강 

 

한말 ‘제물포 조약(1882)’에 조인한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무덤을 역사적 사건과 관련지어 붙인 상징 무덤 이름이 있다.

 

漢원제 때 흉노(匈奴)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 우두머리)’의 첩이 된 왕소군(王昭君) 묘를 청총(靑塚)이라 하고, 漢나라 양웅(揚雄)이 현묘한 사상이 담긴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했다 해 현총(玄塚)이라 했다.

 

漢나라 주매신(朱買臣) 아내가 가난을 참지 못하고 남편을 배신하고 도망갔다. 주매신이 출세해 고향 태수로 부임하자 아내가 부끄러워 자살해 수총(羞塚)이라 했고, 宋대의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의를 주도한 이유로 예총(穢塚)이라 칭했다. 그리고 고려 말 명장 최영(崔瑩)이 이성계 일파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그의 무덤에 풀이 나지 않아 적총(赤塚)이라고 기록돼 있다.


중국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의 <강태공전>에 “남편이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으면(赤塚) 재혼하고’ 풀이 무성하면 과부로 살아라.”는 유언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종교적으로 가능할 뿐이다. 이유원 학자가 말한 오총(五塚) 중에 최영의 적총(赤塚)과 왕소군의 청총(靑塚)은 누명과 한(恨)에 맺혀 묘(墓)에서 결백과 애환을 표출됐다.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요동에 귀속시키려 하자, 최영은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왕과 함께 평양에 이동 요동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이 좌절됐다.

이성계가 지휘한 회군 세력이 개경으로 진입해 성을 지킨 소수의 군사로 대결하다 최영 장군(73세)이 체포돼 고봉(高峯, 고양)과 충주로 유배됐다가 개경으로 압송돼 재산 축적과 공요죄(攻遼罪=요동을 공격한 죄)로 참형(斬刑) 당했다.

최영은 참형 전 예언을 했다. “내 평생 탐욕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언하고 죽었다. 1530년에 발간된 《新增東國輿地勝覽》 11권에는 “최영 묘(崔瑩墓)가 고양현 대자산에 있는데, 무덤 위에 지금도 풀이 나지 않는다.”라고 기록됐 있다. 간행 년도를 환산하면 142년 간 풀이 나지 않는 적총(赤塚)으로 최 장군의 결백을 보여 준 것이다.

후한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따르면 왕소군은 漢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당시 후궁들은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뇌물 주고 미인 초상화를 그려 황제의 총애를 받으려 했으나 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못해 얼굴이 추하게 그려져 총애를 받지 못했다.

흉노와의 화친 책(BC33)으로 흉노 ‘호한야선우’에게 후궁 중에 한 명을 보내기로 했는데, 한원제는 초상화를 보고 가장 못생긴 소군을 뽑았다. 간택된 소군은 흉노의 의상을 갈아입고 말을 타고 비파를 타며 슬픔과 비탄, 분노의 노래를 부르며 선우와 함께 떠났다. 원제가 떠나는 소군의 모습을 보니 정말 절세가인이었다. 몹시 화난 원제는 왕소군을 추하게 그린 ‘모연수’를 참형시켰다.

▲ 이동환 풍수원전연구가
적총과 청총의 공통점은 그 당시 묘의 국세와 명당의 풍수적 길흉에 대한 법술적 평가 자료를 찾지 못했다. 다만 최영 장군은 억울하게 죽은 원혼 신앙(寃魂信仰)이 작용해 무속인들이 전국 여러 지역에서 당신(堂神)으로 모시고 있고, 왕소군 청총은 내몽골 사람들의 민속 전설과 젊은 여성의 임신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20C 유럽(영국, 프랑스)에도 권력의 폭압 앞에 시민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면, 노래를 만들어 부른 “살인발라드(Murder Ballad)”가 전 세계에 퍼뜨렸던 것처럼, 왕소군의 애절한 비파곡(琵琶曲)과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의 노래가 요즘 대선 정국에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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