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시대와 ‘큰’엄마

최문형 성균관대 학부대학 겸임교수
news@segyelocal.com | 2020-10-29 11:26:20
▲최문형 성균관대 학부대학 겸임교수
엄마였다. 그녀는 그저 엄마였다. 

많은 자녀를 가슴에 품은 엄마! 최초의 여성독립의병장 윤희순 여사! 

 

안사람의병단 대장, 노학당 교장, 13편에 달하는 가사의 작가, 조선독립단과 가족부대 지도자, 이 모든 직함을 한 마디로 아우르면 엄마, ‘큰’ 엄마셨다. 

 

그 옛날 달을 품었던 곰이 간절하게 소망했던 엄마의 자리는 수 천 년을 건너와 한반도와 만주를 뒤흔든 엄마가 됐다. 


나라의 엄마였던 명성황후 민비 시해에 맞서 불끈 일어선 엄마의 ‘큰’엄마 노릇의 시작은 ‘밥주는 엄마’였다.

 

나라를 위해 일어선 배고픈 의병들에게 저녁밥을 지어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혼자서 조용히’ 가 아니었다. 

 

동네 엄마들을 모아 놓고 의병대를 돕자고 설득한 적극적인 엄마였다. 

 

의병가사를 지어 동네사람들과 함께 부르며 일제에 강력히 저항한 함께하는 엄마였다. 

 

가무를 즐기는 우리민족은 그렇게 그녀의 노랫가락으로 하나가 되어 투쟁했다. 


그녀는 대중문화운동가였으며 동시에 빼어난 작가였다. 

이렇게 시작된 항일활동의 길에는 순간 머뭇거림도 있었다. 화서학파 집안 며느리였던 탓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누구나 고민했던 유학이념과 현실 사이의 갈등 속에서 그녀는 역동적 전진을 택한다. 

 

‘아무리 여자라도 나라사랑은 모르지 않으며 아무리 남녀가 유별하여도 나라 없이는 소용없다’는 <안사람의병가>의 노랫말이 그렇다. 


국가의 안사람을 자처한 그녀는 가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활약했다.

 

애국계몽운동의 취지로 동창학교의 분교인 노학당을 세워 교장으로 일했고,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된 후에는 무장투쟁운동을 재개한다.

 

조선독립단을 조직하여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산에서 군사훈련을 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떠나보냈어도 의연히 버티며 투쟁했지만 뒤이어 큰 아들이 고문 끝에 순국하자 무너져 내린 그녀는, 엄마이다. 


알고 보면 이 모두가 엄마의 일이었다. 

 

밥 먹이기, 가르치기, 가족 지키기, 밭일하기, 그리고 문화활동까지. 일제가 불을 질러 불타는 집안에서 어린 손자들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면서도 나라사랑의 끓는 가슴으로 민족을 끌어안은, 그녀는 ‘큰’엄마셨다.

 

‘이국만리 이내신세 슬프도다 슬프도다. 애달도다 애달도다 우리의병 불상하다 이역만리 찬바람에 발작마다 어름이요 발끝마다 백서리라 눈썹마다 어름이라 부모처자 떠쳐노코 나라찾자 하는 의병’ (‘신세타령’ 중에서)


만주에 사는 이웃 중국인들에게 힘을 모아 일제에 저항하자며 모범을 보인 어머니 윤희순의 허묘와 기념비는 지금도 그들의 후손이 정성껏 돌보고 있다.

 

최근 구리시가 ‘13도창의군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13도 창의군 출전의 성지로서의 구리시의 면모를 가다듬고 있다.

 

어머니 윤희순 여사는 충북과 춘천에 기념전시가 돼 있는데 출생지는 구리라고 한다. 

 

그래서 구리에도 모실 계획이다. 워낙 ‘큰’ 어머니시니 방방곡곡 가념관에 모두 모셔도 좋을 것 같다. 


‘매사에 자신이 알아서 흐르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충효정신을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해평윤씨 일생록’ 중에서) 관습보다 시대정신을 따라 옹골차게 살다 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당부다. 

 

흐르는 강물 같은 시대는 지금도 시시각각 옳은 판단과 행동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어머니 윤희순 여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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