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법 적용에 노사 모두 불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을 하루 앞둔 지난 26일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건설사업 현장에서 근로자가 작업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세계로컬타임즈 김영식 기자] 작업 현장에서 일하다 근로자가 사망하는 등 중대재해 발생 시 경영자에게 그 책임을 묻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법)이 오늘(27일)부터 시행된다.
정부는 ‘예방’을 목적으로 시행되는 법이라고 강조하지만, 경영계 및 노동계 양측에서 애매모호한 법 세부사항에 불만을 제기하며 당분간 현장 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 ‘예방’ 강조한 정부…적용 범위 등 지적 빗발
27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이날부터 중대재해법이 시행된다. 이는 상시노동자 50명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적용되며, 앞으로 사업장 내 사망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그 책임을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 직접 물을 수 있게 됐다.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으로는 중대재해에 대한 실질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토대로 제정됐다. 그럼에도 노사 양측은 법 시행 이전부터 지금까지 법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며 반발하고 있다. 중대재해법상 중대재해는 중대산업재해와 중대시민재해로 구분된다. 우선 중대산업재해는 ▲사망자 1명 이상 발생 ▲같은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발생 ▲동일한 유해 요인의 직업성 질병자가 1년 이내 3명 이상 발생 등 요건 중 하나 이상 해당하는 산재를 의미한다. 고용부가 관리·감독 권한을 갖는다. 중대시민재해는 ▲사망자 1명 이상 발생 ▲같은 사고로 2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10명 이상 발생 ▲동일한 원인으로 3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질병자가 10명 이상 발생한 경우 등에 적용된다. 이 경우 수사권은 경찰에 주어진다. 특히 이 법 시행령에서는 급성중독, 화학적 인자, 열사병, 독성 감염 등 각종 화학적 인자에 의한 24개 직업성 질병에 대해서도 업무 관련성이 확인되면 중대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규정했다. 중대재해법은 상시 근로자 5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된다. 앞서 정부는 산업 현장 혼란을 줄이기 위해 근로자 50인 미만 사업장, 공사 금액 50억 원 미만 현장에 대해선 2024년 1월27일로 법 적용을 유예한 바 있다. 중대재해법이 정하는 안전보건 의무 주체는 대표이사로, 사업총괄 권한이나 책임을 가진 사람이다. 이에 준해 안전보건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안전담당 이사)도 경영책임자 등 범위에 포함된다. 다만 중대재해가 발생했다고 반드시 처벌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중대재해법에 따라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등이 ▲재해 예방에 필요한 안전보건 관리체계 구축·이행 ▲재해발생 시 재발방지 대책의 수립·이행 ▲중앙행정기관·지방자치단체가 명령한 개선 시정 등 이행 ▲안전·보건 관계 법령상 의무 이행에 필요한 관리상 조치 등 의무를 지켰다면 책임에서 면제된다. 그러나 중대재해가 발생했고,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등이 이같은 의무를 지키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중대재해가 발생했다는 인과관계가 드러날 경우 처벌이 이뤄진다. 이런 가정하에 사망자가 발생했다면 1년 이상 징역과 10억 원 이하 벌금의 형사처벌이, 부상자 및 직업성 질병자가 발생하는 경우 7년 이하 징역 또는 1억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특히 사망자 발생의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 적용 가능성도 열어뒀다. 정부는 이 법의 제정 취지가 사업주 처벌보다는 예방에 있다는 점을 연일 강조하고는 있으나, 여론은 악화일로다. 처벌 대상과 기준이 모호하다는 게 산업계 중론이다. 먼저 법상 처벌 대상이 ‘경영책임자 등’으로 명시됐다는 것이다. 일단 ‘경영책임자’가 기업의 오너인지, 계열사 대표인지, 안전보건 책임자인지 명확하지 않은 데다 ‘등’에는 경영책임자 외에 누가 포함되는지 구체적 처벌 대상이 모호하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중대재해법이 정한 안전보건 의무 이행 규정이 사업장별 사정이 제각각임에도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일각에선 오히려 법을 잘 지켰음에도 처벌받는 것 아니냐는 주장마저 나온다. 중소업체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최근 중소기업중앙회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중소 제조업체의 53.7%가 중대재해법의 의무사항 준수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건설업계에선 중대재해법 시행 뒤 한동안 아예 작업 중단을 선언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결국 기업 입장에선 관련 판례가 충분히 쌓여 세부 기준이 명확히 수립되기 전까지는 안전경영 관련 불확실성을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됐다는 지적이다. 앞서 안경덕 고용노동부장관 역시 최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 법이 시행돼 판례가 쌓이면 (기준이) 가시화될 것이고, 시행령 등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노동계에선 줄기차게 법 적용 범위에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현재 법 적용 대상에서 빠진 5인 미만 사업장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산재 사망사고 대다수가 5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 집중됐다는 이유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재해 사망자 828명 중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5인 미만’ 사업장(317명·38.3%)과, 법 적용이 유예된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351명·42.4%)을 합치면 전체의 80.7%에 달한다. 법 시행 이전부터 지적돼온 규정의 애매모호성과 적용 범위 설정 등이 해소되지 않으면 당초 목표인 ‘중대재해 예방’ 달성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