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1] 역사가 머문 자리, 오늘의 화성시를 보다

오경희 기자

pin8275@naver.com | 2026-02-19 14:58:25


용주사(효행)  사진=화성시 제공

[세계로컬타임즈] 화성시는 지난 2025년 1월 1일 대한민국 다섯 번째 특례시로 공식 출범하며 수도권 남부를 대표하는 도시로 자리 잡았다.

인구 100만을 넘어선 대도시이자 전국 상위권 경제지표와 탄탄한 재정 기반을 갖춘 도시로 성장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농어촌의 색채가 짙었던 지역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그 변화의 속도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오늘의 화성을 신도시 개발이나 산업 확장의 결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이 도시는 눈에 보이는 외형 너머에 오랜 시간의 기억과 역사를 겹겹이 쌓아 올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화성은 바다에서 시작됐다. 삼국시대 서해 항로의 거점으로 교역과 방어의 중심지였고, 조선 후기에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하며 왕실의 상징이 더해졌다. 1919년 제암리 3·1운동의 비극 또한 이 도시가 간직한 중요한 기억이다. 번영 이전에 아픔과 저항의 시간이 있었다.

21세기 들어 동탄신도시 개발과 반도체 산업 집적이 본격화되면서 화성은 첨단 산업도시로 전환됐다.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산업 생태계는 인구와 일자리를 끌어들였고, 이는 특례시 출범으로 이어졌다.

결국 화성의 현재는 과거와 단절된 결과가 아니다. 바다의 길목이었던 시간, 왕실 문화의 흔적, 독립운동의 기억 위에 산업의 동력이 겹쳐지며 지금의 도시가 형성됐다. 성장의 속도와 함께 시간의 깊이를 지닌 도시. 이번 기사는 그 연결 지점을 따라 화성의 과거와 오늘을 짚어본다. 

융릉·건릉  사진=화성시 제공

“화성의 정체성이 시작된 공간”… 융릉·건릉

융릉·건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에 속한다. 이는 화성이 단순한 산업 거점을 넘어 국제적 문화유산을 보유한 도시임을 의미한다. 특례시로 성장한 화성이 관광 산업을 확장할 때 가장 강력한 자산이 되는 공간이다.

융릉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장한 곳이며,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능을 옮겼고, 이는 효를 국가적 가치로 세운 상징적 결정이었다. 능행길을 닦고 제례 공간을 정비하며 용주사를 창건한 일은 이 일대를 왕실의 상징 공간으로 만들었다.

왕이 선택한 땅은 단순한 지방이 아니다. 융릉·건릉이 자리한 이후 화성은 조선 후기 왕실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도시 정체성의 출발점이다.

신도시 상당수가 역사 서사의 부재를 겪지만 화성은 다르다. 바다에서 시작된 교통의 도시, 효 정치가 남은 공간, 항일의 기억을 품은 공동체라는 서사가 겹쳐 있다. 그 중심에 융릉·건릉이 있다. 왕릉은 과거의 유산이면서 동시에 현재를 설명하는 기반이다.

화성 당성    사진=화성시 제공

바다를 지킨 성곽… 화성 당성

화성 당성은 삼국시대 해상 방어 거점으로, 서해 항로를 통제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교역과 권력의 흐름이 오가던 이곳은 화성이 외부 세계와 연결된 첫 관문이었다.

도시는 연결에서 시작된다. 당성이 지키던 바닷길은 이동과 교류의 중심을 형성했고, 이후 조선 후기 정조의 능행길이 닦이며 또 한 번 ‘길목’의 역할을 했다.

오늘날 화성은 고속도로와 광역 교통망, 반도체 산업과 신도시 개발이 맞물린 수도권 남부의 핵심 성장축이다. 과거에는 배가 드나들었고 지금은 기업과 인재가 흐른다. ‘흐름이 모이는 공간’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당성은 고대 교통 중심지에서 산업도시로 이어진 시간의 출발점이다. 특례시 화성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원이다.

정조의 뜻이 남은 곳, 용주사

용주사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1790년 창건한 왕실 원찰이다. 정치적 비극을 겪은 아버지를 향한 마음을 공간으로 남긴 곳이다.

오늘날 용주사는 신도시와 산업단지 사이에서 고즈넉한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융릉·건릉과 함께 둘러보면 정조의 ‘효’가 어떻게 도시의 상징이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산업도시 화성의 현재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은 이러한 역사 공간들이다.

남양성모성지  사진=화성시 제공

신앙의 기억을 품은 도시, 남양성모성지

남양성모성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역사가 남은 공간이다. 국가 질서 속에서 배척받았던 신앙의 흔적이 이곳에 남아 있다.

화성은 해상 교통의 요지였고, 왕실의 상징이 자리한 공간이었으며, 항일의 아픔을 간직한 땅이다. 남양성모성지는 여기에 개인의 신념과 공동체의 믿음이라는 또 다른 층위를 더한다.

오늘날 이곳은 순례객과 방문객이 찾는 평온한 공간이다. 빠르게 성장한 산업도시 속에서 잠시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장소이자, 도시의 정신적 깊이를 보여주는 자산이다.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역사문화공원   사진=화성시 제공

항일의 역사, 성장의 토대가 되다…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역사문화공원

화성의 성장은 산업과 인구 증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과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근현대사의 상처와 기억을 전하는 공간이다.

1919년 제암리 학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민간인 희생의 비극적 사례로 기록된다. 오늘날 기념관은 공동체의 기억을 보존하며 지역 독립운동의 흐름을 보여준다.

왕실의 역사와 함께 민중의 저항을 품은 도시. 화성은 산업 성장 위에 역사적 성찰을 더하며 발전해 왔다. 특례시 출범은 경제 규모의 확장일 뿐 아니라, 기억을 지켜온 공동체의 시간 위에서 이뤄진 결과이기도 하다.

도시를 지탱하는 오래된 시간

화성의 역사는 잊히지 않는다. 바다의 길목에서 시작된 시간과 왕실의 흔적, 항일의 기억은 산업의 속도 뒤편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눈부신 성장과 특례시 출범이라는 현재의 성과를 말없이 바라보며, 이 도시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화성의 발전은 그렇게 과거를 지운 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과 함께 걸으며 완성되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오늘도 변함없이, 도시의 내일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세계로컬타임즈 / 오경희 기자 pin827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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