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곳곳 12사도 관련 조형물 설치
순례자의 섬(길)으로 항구 활성화▲순례자의길(사진=서해지방해양경찰청)
[세계로컬타임즈 김명진 기자] 소악도와 대·소기점도는 전남 신안군 증도면에 속한 섬으로 지리적 위치상 신안군의 내해에 위치한다. 암태도 방향의 천사대교에서 봤을 때, 우측에 위치하는 섬들로 간조 시에는 3개 섬이 모두 노두에 의해 연결된다.
가장 북쪽에 자리한 섬이 대기점도이며, 그 아래의 남쪽이 소기점도, 그리고 다음이 소악도다. 그런데 소악도 선착장이 위치한 곳이 진섬이고 이 섬 또한 노두로 연결돼 있으며, 대기점도와 병풍도 또한 노두로 연도돼 있어 이들 5개 섬 모두는 4개의 노두에 의해 하나의 섬이 되고 있다. 현재 이들 섬은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마찬가지로 방문객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 섬을 흔히 순례자의 섬으로 부르며, 이들 섬을 연결하는 8km의 길과 노두를 순례자의 길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순례자’와는 사실상 큰 연관성이 없다. 신안군에 따르면 이 같은 명칭의 대중화는 군의 섬 특성화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생겨나 정착됐다고 한다.
처음에는 노두 길이 바닷물에 잠겨 다시 열리는 것에서 착안해 ‘기적의 섬’으로 불렸으며, 이후 섬 곳곳에 예수님의 12사도를 연관시키는 ‘기념물’들이 들어서면서 ‘순례자의 섬과 길’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여기에 한 전도사가 한국전쟁 당시에 이곳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한 실제적 사건까지 곁들여 지면서 이 같은 명칭은 이들 섬의 별칭이 됐다는 것이다. 이들 섬 사이에 언제 노두가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서는 주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다소 엇갈린다. 자신들이 사는 섬이 다르고 노두가 4개나 되며, 현재와 같은 길 형태는 긴 세월을 두고 조금씩 변화돼 현재에 이르렀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소악도와 소기점도를 연결하는 노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징검다리 형태로 있었다고 합니다. 차량이 다닌 것은 2007년께부터로 기억합니다.” 44년 전 결혼해서 소악도로 이주했다는 장명순씨(70·소악도)는 자신의 교회에서 목사를 중심으로 연간 기도제목으로 차가 다닐 수 있는 노두길을 정해 기도했다며 차가 다니기 전의 노두는 낮은 둑 형태였는데 포장할 때 둑을 높였다고 말했다. “징검다리는 아주 옛날부터 있었어요. 훼손되면 마을 주민들이 산에서 돌을 져 나르고 배에 돌을 실어 보수했습니다. 시내계곡의 돌다리처럼 큰 돌을 한두 개 놓아 만든 것이 아닌 여러 개의 돌을 무더기로 쌓아 답처럼 만든 다리였어요” 대기점도 토박이인 오지남씨(85·대기점도 남촌마을)는 징검다리가 놓인 것은 아마 수백 년도 더 됐을 것이라며 아이들도 건너가야 하기에 폭은 약 50cm정도로 좁았고, 자기도 어렸을 때 이 다리를 건너 병풍도로 학교를 다녔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병풍도-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진섬은 4개의 노두길에 의해 차량 통행이 가능한 사실상 한 개의 섬과 같다. 때문에 이들 섬의 주요 관문 역할을 하는 병풍도의 경우 차도선 이용객이 여타의 항구에 비해서는 많은 편이다.▲노두-대기-병풍(사진=서해지방해양경찰청) 하지만 이들 노두길은 조금 때를 비롯해 한 달 평균 3~5일을 제외하고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2~3시간가량 물에 잠긴다. 그 시간에는 다시 각각의 섬으로 돌아간다. 이들 섬의 경우도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마찬가지로 70년대 후반까지는 종선을 타고 객선을 탔으며, 당시 소악도에서 목포 앞 선창으로 가는 배가 있었다고 한다. 2000년 무렵, 하루 2회 운항된 이 배는 대기점-매화도-병풍도를 거쳐 무안군 신월까지 갔다고 한다. “50여 년 전에는 ‘진성호’가 다녔고 이어 ‘영신호’, ‘한양호’가 다녔어요. 이들 배는 당사도-소악도 등을 운항했습니다.” 인근 섬에서 소기점도로 시집왔다는 이봉님씨(76·소기점도)는 당시 신안군에서 지원하는 여객선이 인근 섬들을 운항했으며, ‘한양호’는 목포 앞선창까지, ‘영신호’는 소악-소기점-대기점-목포 뒷개(진동) 간을 운항했다고 기억했다.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마찬가지로 대기점도에서도 육지와 다른 상·장례 풍속인 ‘밤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오 씨는 “상을 당하면 주민들이 상주를 위로하기 위해 술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윷놀이나 화투를 쳤지만 징이나 장구는 치지 않았다”며 “상주의 경우 놀지 않았고 30여 년 전에 이 풍속(‘밤다리’)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한편, 소기점도의 경우 예전에 ‘장그점’이라 불렸으며, 대기점도는 벼농사도 많이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쌀이 귀해 보리나 서숙 등을 섞은 잡곡이 주식이었으며, 보리고개 철에는 쑥+보릿가루, 쑥+좁쌀 죽이나 풋보리를 베어다가 쪄서 밥을 해먹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