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꽃 설화

민순혜

joang@hanmail.net | 2022-05-24 11:24:46

시인 박규리
합송시 김명관, 김선미

치자꽃 설화 

            시인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사랑하는 일이야말로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 박규리, 『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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