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조사위원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기

이우춘 / 2016-11-07 00:00:22
독립투사들의 의지는 아직도 '생생'
일제의 학살..소련의 탄압..설움의 땅

▲ 세계일보 조사위원 및 통일지도자아카데미 수강생들로 구성된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이 21일 우수리스크의 발해국 솔빈부가 위치해 있던 성터에서 파이팅을 외치며 기념촬영하고 있다.

[세계일보 이우춘 조사팀장] 세계일보 조사국에서는 10월 18일부터 22일까지 극동러시아에 위치한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및 우수리스크(Ussuriysk) 지역의 독립운동 유적지을 탐방했다. 조국통일의 정론지 세계일보가 남북통일에 이바지하고 민족정기를 발양하기 위해 실시하고 있는 제4기 통일지도자 아카데미의 원우와 조사위원 67명이 함께했다. 우리민족 고유의 유물·유적지 답사 그리고 목숨을 건 항일 독립투사들의 발자취에서 국가 잃은 민족이 겪어야 했던 참상을 실감한 여행이었다.

▲ 하바롭스크시를 흐르는 아무르강(흑룡강 黑龍江)

 

양양에서 출발해 2시간 남짓 도착한 하바롭스크 아무르강변의 야경은 쌀쌀한 날씨에도 아름다웠다. 하루를 묵고 첫 일정으로 우초스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에서 아무르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극동러시아에서 가장 번성했던 문화와 예술의 도시 하바롭스크는 유유히 흐르는 아무르강(흑룡강 黑龍江)처럼 조용하고 평온한 모습이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 동양의 유럽이랄까? 건축양식에서부터 완전 유럽풍이다. 우초스전망대 앞에는 동부 시베리아 총독을 지냈고 아무르강을 발견한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동상이 아무르강을 바라보고 있다.

 

▲ 탐방단이 10월 19일 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 앞에 시멘트가 발라진 돌거북비석(발해유물 추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전망대 가는 길에 본 고대유물이 탐방단을 아연실색케 했다. 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 구관 앞에 자리한 돌거북 비석이다. 좌우 양옆에 놓인 원숭이 모양의 돌기둥이 돌거북을 보호하듯 배치되어 있는데 돌거북 등 위에 있는 비석이 시멘트로 말끔히 메워져 있었다. 비석의 글귀를 아예 볼 수 없도록 말이다. 비석의 글귀를 보고 어느 시대 누구의 유물인지 알 수 있을 텐데 무자비한 유물훼손이다. 뒤틀린 누군가의 역사의식을 가늠케 한다. 이 돌거북 비석은 우수리스크에서 두 개가 발견되어 하나를 이곳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거북의 형태를 볼 때 발해의 유물이며, 발견 장소가 우수리스크 인근이라는 점에서 발해의 영토가 이곳까지 확장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 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에 전시된 백두산 호랑이와 같은 혈통의 아무르호랑이 박제모습

아무르강변의 하바롭스크 향토 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은 구관과 신관으로 나뉘어 하바롭스크 지역의 자연사 및 역사, 문화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아무르 지역에서 서식하는 동식물에서부터 멸종한 맘모스까지 다양했다. 백두산 호랑이와 같은 혈통의 시베리아 호랑이며 아무르 표범과 삵에 이르기까지 수십 종의 동물 박제가 탐방단의 이목을 끌었다.

▲ 탐방단이 10월 19일 아무르강 앞에 위치해 있는 꼼소몰스까야 광장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이후 러시아의 역사와 함께 한 동방 정교회로 세 번째 규모의 구세주성당과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를 기리는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 및 무명용사의 비를 둘러봤다. 하바롭스크에서 시간이 허락지 않아 시인 조명희와 최초의 한인 여성 볼셰비키인 김 알렉산드라의 유적지에는 들를 수 없어 아쉬웠다.

 

▲ 탐방단이 10월 19일 방문한 하바롭스크의 2차세계대전 참전용사를 기리는‘꺼지지않는영원의 불꽃’

날이 저물 무렵 하바롭스크 역에서 14시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0월 20일 아침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 세계일보 조사위원회 용산구협의회 회원들이 10월 20일 시베리아 횡단열차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역 9,288㎞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화창한 아침햇살에 고풍스런 모습을 뽐내며 탐방단을 반기는 듯한 블라디보스토크역은 9천288㎞ 떨어진 모스크바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역이자 종착역이다.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은 이 정거장을 통해 이동했으며 특히 1909년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서 하얼빈으로 떠났던 곳이다.

▲ 블라디보스톡 시내 중심지 중앙광장(혁명전사광장)

근처의 중앙광장(혁명전사광장)은 150년 전 블라디보스토크가 탄생한 장소로 1958부터 1991년까지 철의 장막시대에 해군사령부가 지키고 있던 탓에 지금까지 기차역이 보전 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항구가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역 가까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화려한 개선문, 젊음의 아르바트 거리 등등 2km 반경내에 위치해 있다.

 

▲ 구한촌 앞바다. 고려인을 신한촌으로 강제이주시키기 전 번성했던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의 현재 모습.

먼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의 고려인 발자취를 따라 초창기 고려인들이 집거지를 형성한 개척리의 구한촌(舊韓村, 현 해양공원) 찾았다. 1860년대 흉년으로 굶주린 한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 마을을 세웠고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대규모로 정착했지만 러시아가 1911년 구한촌을 강제 폐쇄시키면서 신한촌(新韓村)으로 이주했다. 1911년 제정러시아 당국은 콜레라 창궐등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 한인들을 구한촌에서 아무르만 산기슭으로 이주시켰다. 지금 신한촌 기념비가 세워진 곳이다. 

▲ 박귀종 조사위원 중앙위원회 의장(오른쪽세번째)이 10월20일 일행들과 함께 해양공원으로 변한 구한촌거리를 거닐고 있다.

이어 독립운동의 대부이자 후견인으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를 도왔던 최재형 선생(1858~1920)의 블라디보스토크 주거지에 들렀다. 연해주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독립운동에 온기를 불어 넣는 페치카(난로)라고 불렸던 최재형 선생이 우수리스크로 이주하기 이전인 1919년까지 거주했던 곳이다.

▲ 탐방단이 10월 20일 블라디보스토크의 2차세계대전 참전 잠수함박물관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광장과 C-56잠수함 및 개선문을 둘러보고 영원의 불꽃(혁명의불)을 찾았다. 이 기념 불꽃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붉은광장은 물론 하바롭스크에도 있어 사회주의 국가의 상징이다. 이곳의 불은 혁명의 기념물로 태풍에도 꺼지지 않게 기술적 완벽성을 갖췄다고 한다. 

 

▲ 탐방단이 10월20일 블라디보스토크 전망대(일명 독수리전망대)에서 금각교를 배경으로 기념촬영하고 있다.

셋째날 마지막 일정으로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의 명물 금각교(金角灣)와 도시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일명 독수리전망대에 올랐다.

▲ 러시아와 슬라브 국가의 키릴문자를 만든 키릴형제 동상

러시아와 슬라브 국가의 키릴문자를 만든 키릴형제 동상이 우뚝 서 있는 독수리전망대는 조국 독립운동에 뜻 깊은 유적지라 한다. 조국과 만주일대 그리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높은 오들리노예 그네즈도산(Orlinoye Gnezdo Mt.)의 전망대는 만남의 장소로 눈에 띄는 곳이었을 것이다. 

넷째날 탐방단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1911년 구한촌에서 옮겨간 곳이 신한촌이다. 연해주 고려인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재외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상해보다 앞선 1919년 2월 들어선 곳이다. 신한촌 한인들은 1919년 3‧1운동 직후 같은 달 17일 대규모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다음달 4월에 일본군의 보복으로 300여명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 이후 스탈린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인들을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강제로 보내는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했다. 1992년 1월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와 11개 독립국가로 분리되면서 고려인들에 대한 배타주의 운동이 확산되어 직장에서 추방당하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져서 다시 연해주지방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 러시아에는 20만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당한 후 80여년이상 세월이 흘러 탐방단이 본 신한촌은 한인의 자취는 사라지고 권업회가 있던 자리는 러시아인들의 생활무대가 돼버렸다. 

 

▲ 연해주 독립 운동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신한촌 기념비”

다행히 1999년 8월 한인들의 집단 거주지였고 상해로 옮겨가기 전 항일독립운동의 시발지 역할을 한 신한촌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기념탑 건립 경위와 기념탑건립에 중심적 역할을 한 해외한민족연구소 관계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탐방단은 신한촌기념비에 헌화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투사들을 기렸다. 

▲ 탐방단이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의‘신한촌기념비’를 방문해 단체로 참배한 후 가이드로부터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의 발자취와 기념비 건립배경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이어 탐방단은 우리나라 최초 임시정부 수립지로 알려진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 우수리스크 가는 도중에 있는 라즈돌리노예역. 고려인 강제이주라는 반 인륜적 역사를 감추려는 듯이 새롭게 단장을 하고 있다.

우수리스크로 가는 도중 라즈돌노예 역에 들렀다. 주변에 우수리강이 흐르고 러시아인들의 주말농장인 다차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목가적 풍경이지만 한인들에게는 굴곡진 역사의 한(恨)이 서려있는 역이다.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1937년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땅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이주를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강제이주의 첫 번째 이유는 러일전쟁에 패배를 맛봤던 러시아 입장에서 고려인이 일본인과 외모가 비슷해 일본인 간첩 색출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고려인이 간도지방과 접경한 러시아의 군사 요충지에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셋째는 고려인을 연해주에서 모두 추방시켜 일본과의 대결에 미리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의 황무지 개발과 더불어 군량미 확보라는 일석이조의 목적이었다.

소련의 공식문서를 보면 나무판자로 된 124대의 화물열차에 17만1781명이 탔으며 중앙아시아 10개 지역으로 수송됐다. 6천km 떨어진 중앙아시아까지 40여일 걸렸다. 시베리아 삭풍이 휘몰아치는 화물칸에서 얼어 죽고, 굶어죽고, 홍역과 학질 등의 병으로 앓아죽는 등 극한의 강제 이주 과정에서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하지만 한인들은 주거 이전의 자유 억압 등 소련의 탄압이 가중되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존경받는 민족이 됐다. 

드디어 한인과 독립운동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0여㎞ 떨어진 우수리스크는 연해주에서 두 번째 규모의 도시다. 먼저 발해국(698~926)의 솔빈부(率賓府)가 자리했던 유적지를 찾았다. 한·러공동 연해주 발해유적 발굴조사에 의하면 우수리스크 부근에서 옥저의 청동기 유적과 발해의 고분 등 연해주에서의 한민족 역사의 맥이 확인되고 있다 한다.

 

▲ 탐방단이 연해주의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가인 최재형 선생의 집을 방문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어 최재형 선생의 고택에 들렀다. 선생이 말년에 살았던 원형 그대로의 고택은 한국 정부에서 최근 사들였고 곧 독립운동 기념관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함경도 출신인 최재형은 어렸을 때 연해주로 이주해서 상업활동으로 돈을 벌어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위해 1908년 의병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했고, 권업회의 초대 회장이기도 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재무총장을 맡았지만 이듬해 일본군에 체포되어 순국했다.

고택의 현판에는 “최재형의 집, 이 집은 연해주의 대표적 항일독립운동가이며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였던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곳이다”라고 적혀있다.

▲ 세계일보 조사위원 및 통일지도자 아카데미 수강생들로 구성된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이 10월 21일 우수리스크에 있는 헤이그밀사 이상설 선생 유허비 앞에서 참배를 하고 있다.

탐방단은 우수리스크 인근 수이푼강이 굽이 흐르는 강변에 자리한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에 다다랐다. 고종황제의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바 있는 이상설 선생은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 있는 동포들을 모아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웠다. 선생은 헤이그 밀사에 대한 일제의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러시아에 망명했다. 망명 후 병사할 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다.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은 화장돼 수이푼 강물에 뿌려졌다.

▲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 겸 고려인문화센터 모습

유허비에서 참배를 마치고 발해국 솔빈부가 위치해 있던 성터와 안중근 의사 기념비가 있는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를 방문했다.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강제이주에서 다시 돌아온 수만 명의 고려인들이 이곳에 정착해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 기념관’과 ‘고려인문화센터’를 중심으로 다시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재러동포로서 뿌리를 내리고 바람직한 한‧러관계를 위해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도록 정부 차원의 정책적 지원도 절실함을 느꼈다. 

▲ 우수리스크의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겸 '고려인문화센터' 앞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비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이번 탐방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서 아카데미 원우들과 조사위원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소중한 담론을 공유하게 해준 뜻 깊은 여정이었다.[글‧사진=세계일보 이우춘 조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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