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모그래피 창시자 무산 허회태 작가

이종학 / 2017-02-13 12:35:25
글씨인 듯 그림인 듯…외국 사람들과도 통하네요
주 4일은 미술관서 작품 전념… 3일은 후학 교육
국내외 전시회 준비로 분주…美 CNN 집중취재도
逸遊(일유) Enjoy oneself in comfort 170X130cm.

 

[세계로컬신문 이종학 조사위원] 오랜 기간 갈고닦은 전통서예에 회화적 요소를 가미해 ‘이모그래피’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해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무산 허회태 작가.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에 2년 전 문을 연 카이로스허회태미술관에서 그를 만나 최근 근황과 작품세계,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 요즘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일주일 중 4일(목·금·토·일)은 이곳 미술관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3일(월·화·수)은 서울 방배동의 ‘무산서예’와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오는 4월 국내전시와 6월 유럽 전시를 앞두고 작품 마무리와 팜플릿 제작 등 바쁜 일과를 소화하고 있다. 2월 초에는 미국 CNN 취재진이 방문해 5일 동안 인터뷰는 물론 작품활동, 일상 등에 대해 집중 촬영하느라 바빴다.

▲ 생명의 꽃 1

- 이모그래피란 무엇인가?

이모그래피란 감정을 뜻하는 이모션(Emotion)과 회화를 뜻하는 그래피(Graphy)의 합성어로 전통서예와 회화를 합병한 새로운 예술 장르로 서예를 현대미술의 회화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작품세계를 의미한다. 5세때 서예에 입문해 50년간 온갖 서체를 갈고 닦은 필력을 바탕으로 창조해 낼 수 있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장르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모그래피라는 명칭을 처음 만들어 낸 재독일 평론가 류병학씨는 ‘이모그래피는 사물을 본 떠 관념을 나타낸 문자가 아니라 감성을 나타낸 흔적’이라고 정의했다.

- 이모그래피를 처음 창시한 배경은?

40년간 서예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이에 매진하려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최고의 실력으로 왕희지와 추사를 능가한 들 현대에 무슨 가치가 있나’ 고민하게 됐다. 또 기존의 서체를 답습하는 일에 다소간 회의를 느끼게 됐다. 더구나 서예는 동양문화권에 국한되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진정한 예술이라면 전 세계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서예기법에 감정을 담아 사물을 표현 해 낸 작품을 통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소통할 수 있게 됐다.

 

생명의 꽃4

- 작품을 보면 문자인지 그림인지 헷갈린다. 문자와 그림 중 어느 쪽에 가까운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작품을 시작할 때 사물의 본질과 속성을 넘어 기운이 생동하는 참 모습을 포착해 정교하게 삽화적으로 창조해 내는 것이므로 때로는 문자 쪽에 때로는 회화 쪽에 가깝다. 언뜻 보면 서양화 장르중 추상화처럼 보여 질 수도 있다. 작품의 바탕 자재는 가장 기본이 되는 종이(화선지) 외에도 도자기, 가구, 의상, 전각(篆刻) 등 다양하다. 작품 대부분은 처음 대할 때 단순한 문자나 선의 흐름을 보게 되지만 면밀히 들여다보면 훨씬 깊은 의미의 이미지를 만나게 돼 관객 스스로가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도록 해 준다.

- 이모그래피 작품 창작 과정을 설명해 달라.

우선 모든 사물을 대할 때 작품에 쓰일 모티브가 없는지 유심히 관찰한다. 심지어 젊은 층이 주로 사용하는 이모티콘(Emoticon)은 물론 각종 순수 및 산업디자인의 흐름들까지 모두 검토 및 연구 대상이다. 한번 작품 대상이 선정되면 깊이 상념하며 머릿속에 각인 될 때까지 작품을 표현해 내는 작업에 임한다. ‘일체무애’라는 작품의 경우 만족할 만한 최종 작품이 나오기까지 2년이나 소요됐다. 이를 위해 수천 장의 화선지가 버려졌다.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는 작품은 없다. 오히려 뭔가 만들어내려고, 혹은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작품은 나오지 않는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험과도 비슷하며 나를 완전히 잊고 사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도달할 때 진정한 작품이 나오는 것 같다.

허회태 작가(오른쪽)가 미술관 방문객들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 전시실에 조각작품도 많은데 설명해 달라.

이모그래피에서 더 나아간 ‘이모스컬퓨처’로 이모션(감정)과 스컬퓨처(조각)가 결합된 말이다. 화선지에 세필로 글씨를 쓴 뒤 이를 사등분한 구 모양의 작은 스치로폼에 일일이 감싼 후 다시 캔버스에 붙여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또 화선지를 꼬아서 붙이고 빨강과 파란 색 등을 사용한다. 작은 조각들이 모여 큰 조각이 되고 작품이 된다. 천지만물이 모여 우주가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 작품들을 본 사람들은 작품 가운데 있는 작은 원모양의 빨간색 보고 “알같다. 눈같다. 자궁 아닌가. 용암모양이다”라고들 말한다. 평면적인 종이의 틀에서 벗어나 3D 작품으로써 관객의 곁으로 다가가 소통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였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무한대의 상상력을 주고 있다.

작품들을 통해 위대한 탄생, 에로티시즘의 역사, 삶의 연속성, 무한 반복성, 에너지와 생명의 원초적 현상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허회태 작가(오른쪽)가 미술관 입구에서 방문자와 기념촬영하고 있다.

- 수많은 해외 전시를 통해 서구 예술계에 어떤 메시지를 남겼나요?

오직 한번의 붓질로 번득이는 찰나의 세계를 표현한 작품에 대해 독일과 미국 같은 서구권에서 많은 각광을 받았다. 특히 이모그래피 작품세계는 영혼을 인도 하는 예술 작품이면서 소름 끼친 전율을 느꼈다고 표현했다. 언론들도 새로운 장르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잇따랐다. 미국 폭스방송과 ABC방송에서도 생생하게 보도했었다. 그리고 이제 많은 예술인들과 콜렉터들이 인정하고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에 많이 놀라고 있다.

- 대형 화선지에 커다란 붓으로 퍼포먼스를 선보여 갈채를 받았는데.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붓에 먹물을 묻히면 그 무게가 상당한데 화선지에 닿으면 자칫 찢어질 수 있다. 기를 모아 기합 소리와 함께 붓을 화선지에 던지듯이 내려놓고 그려나갈 땐 주변 구경하는 사람들의 기까지 빨아들여 작업을 한다. 5분 정도 소요되는 작업을 마치면 혼절할 정도다. 미국에서 7개월간 순회 전시를 할 땐 이 모습에 반해서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옮기는 장소마다 찾아온 관람객도 있었다.

허회태 작가가 대형 붓으로 이모그래피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모습.

- 서예는 몇 살 때부터 배웠나?

큰 아버지께서 서당을 운영하셨고 서예가이자 한학자이셨기 때문에 5살 때부터 자연스럽게 서예를 접할 기회가 있어 큰 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또 중학생시절 각종 대회에서 대상을 타고 고등학교 입학 때는 서예특기장학생으로 입학하며 서예 신동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광주 금호고 시절 학교의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 어린 시절 서예신동으로 화려한 시절을 보냈는데 어려웠던 시절은 없었나?

1970년부터 국선에 20번 도전했으나 12번이나 낙선해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 했고 자살 시도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깊었던 인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오히려 중·고등학교 시절 전국대회 상을 휩쓸었던 때의 무엇인가의 잠재의식이 있었다.

- 침체의 시기동안 어떻게 내공을 잘 갈고 닦았다고 볼 수 있는가?

추사 김정희 선생은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1000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저는 서예를 시작한 이래 하루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을 정도이며 열흘에 붓 한 자루가 닳고 한 달이면 20여 개의 먹을 썼을 만큼 노력해 왔다.

허회태 작가가 미술관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

 

- 그런 고통의 시간을 겪은 후 드디어 빛을 보게 됐는가?

1995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서예부문에서 목간체로 쓴 ‘이옥봉의 시’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하게 됐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수상은 서예인들에게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다. 목간체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 서한(西漢)시대에 나무 조각에 먹을 사용해 쓴 서체를 말한다. 대상 수상 이후 ‘목간체’가 서예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었다.

- 성공적인 독일, 미국 전시회를 통해 이모그래피를 더 널리 알릴 기회가 됐을텐데 앞으로의 계획은?

중국 북경소재 예술의 거리에서 초대전과 프랑스 파리를 비롯한 해외에서 전시회를 열고 싶다.

허회태 작가가 미술관 입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 무산 허회태 작가는 

고교시절 개인전 연 ‘서예 신동’
20번 도전 끝에 국전 대상 받아

무산 허회태 작가는 1957년에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지방에서 이름난 서예가로 한학에 뛰어난 백부(강헌 허영재)에게 한문과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는 성균관 대학교 주최로 열린 휘호 대회에서 개인 최고상을 수상했으며 한국, 캐나다 문화재단이 주최한 전국 학생 미술 작품 전시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전남도전에 일반부로 입선했고 2학년 때는 학교 측의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서예신동’이라 불렸던 그는 국전에 20번째 도전한 1995년에서야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에서 영예의 대상을 받았다.

이후 1996년 뒤늦게 남서울대학교 중국학과 입학해 문·사·철(文思哲)을 공부했으며 2005년 상명대학교 대학원 회화과에 입학해 ‘書에 근원을 둔 회화의 현대적 표현 연구 -본인 작품을 중심으로-’ 라는 제목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변 대학교 미술대학 회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카이로스허회태미술관장을 맡고 있다. 그는 또 세계미술연맹 자문위원과 IACO(국제미술협력기구)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논문과 저서로는 ‘안진경 서예술의 소고’, ‘전각 예술의 생명이 의미하는 표현형식’, ‘書에 근원을 둔 회화의 현대적 표현연구’, 이모그래피와 전각 작품집인 ‘반야심경’, ‘명언 명 시집’ 등이 있다.

■ 개인전

△2006년 주독일한국문화원 이모그래피 초대개인전(베르린) △2008년 허회태 書·畵·刻 예술 47년 개인전(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2009년 미국 제임스 매디슨 대학교 쏘힐 갤러리 △이스턴 메노나이트 대학교 하츨러 갤러리 △2010년 워싱턴 D.C. 한국대사관 코러스 하우스 △미국 조지메이슨 대학교 메이슨홀 △뉴욕 한국문화원 갤러리 △2011년 윤당갤러리 신년특별기획 이모그래피 허회태전 △광주MBC 기획초대 이모그래피 미술전 광주금호갤러리 △붓 예술50년 허회태 이모그래피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14년 스웨덴 국립박물관초대 허회태 이모그래피 특별전 △2015년 ‘허회태 穴 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16년 Gallery Church 개관 기념 초대전 ‘허회태 개인전’ △2016년 대장경 속 한마디(김형중, 허회태 공저)출판기념 ‘허회태 개인전’ △Gaga Gallery신년기획초대전 ‘허회태 전–위대한 탄생’.

▲ 고등학교 '생활과 철학' 교과서에 무산 허회태 작가의 작품이 소개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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