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특례시, “이름 없는 영혼들에게 바치는 추석”

이숙영 기자 / 2025-10-05 20:49:40
- 용인평온의 숲, 무연고자 1,673위 합동 추모제… ‘기억의 공동체’로 피어난 시민의 연대
용인평온의 숲 ‘다솜마루’ 봉안당 앞마당에서 2025 추석 맞이 무연고 사망자 합동 추모제가 열렸다.

[세계로컬타임즈] 10월 4일 바람이 가을빛으로 변하던 오후, 용인평온의 숲 ‘다솜마루’ 봉안당 앞마당은 조용했다. 하얀 국화와 작은 향 냄새가 바람을 따라 흩어지고, 그 곁엔 이름 대신 번호만 새겨진 위패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누군가는 부모의 이름을, 누군가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겠지만, 이날 이곳에서는 불릴 이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제사상이 차려졌다.

“오늘은 그분들의 추석이다. 혼자 가지 않으시게, 우리가 함께 왔다.” 윤상형 용인시 해오름장례지원센터 대표의 짧은 인사말이 끝나자, 참석자 50여 명은 고개를 숙였다.

제사상에는 햇과일, 송편, 탕국이 정갈하게 놓였다. 누군가의 가족이 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도시의 시민들이 가족이 되어 준 순간이었다.

이날 추모제는 용인시가 매년 이어오고 있는 ‘무연고 사망자 합동 추모제’ 다솜마루에 안치된 1,634위의 유골, 그리고 올해 공영장례를 치른 39명의 고인을 포함해 총 1,673위의 영혼이 함께 추모됐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이분들은 완전히 사라진다.” 김재빈 용인시니어 해오름봉사단 단장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끝은 단단했다.

그리고 김 단장은 10년째 봉사단과 함께 무연고 장례에 참여하고 있다. “가족이 없어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다.”

제례가 시작되자, 낭랑한 북소리와 함께 심규순 명지대 교수의 살풀이춤이 펼쳐졌다. 하얀 한삼이 공중을 그리며 부드럽게 흩날렸다. 춤사위 하나하나가 망자들의 한(恨)을 풀어주는 듯했다. 참석자들은 말없이 숨을 고르고, 고요한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봤다. 바람이 불자, 향 냄새가 더 짙어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무연고 사망자는 전국적으로 3,000명을 넘어섰다. 10년 전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1인 가구 증가, 가족 해체, 경제적 불안, 그리고 공동체 약화가 맞물리며 생의 마지막조차 홀로 마무리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용인시는 2017년부터 해오름장례지원센터를 중심으로 공영장례 지원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단순한 장례 절차를 넘어, ‘존엄한 죽음’과 ‘기억의 공동체’를 위한 시민 참여형 장례 모델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윤상형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죽음을 복지의 영역으로만 보지 않는다. 이건 ‘기억의 문제’이고, ‘관계의 회복’이다. 시민이 함께 고인을 기억하는 순간, 사회는 조금 더 따뜻해진다.”

추모제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각자 향을 하나씩 들고 봉안당 앞에 섰다. 어떤 이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고, 어떤 이는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 말은 없었지만, 마음속 약속이 공기 중에 번졌다.

한 노인은 천천히 무연고자 위패 앞에 송편을 놓았다. “이건 같이 먹자는 뜻이에요. 추석엔 누구나 함께 먹어야 하잖아요.” 그 말에 몇몇 참석자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 장면은 이날 행사의 의미를 모두 설명하고 있었다. 추석의 본뜻은 ‘함께 나누고, 함께 기억하는 것’이었다.

용인시의 무연고자 추모제는 이제 단순한 행정행사가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사회가 서로를 돌보는 방법’을 배우는 장이 됐다. 해마다 추모제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늘고 있고, 청년·학생·봉사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김재빈 단장은 말했다. “처음엔 몇 명 안 되는 봉사자들이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시민들이 먼저 ‘올해도 함께하자’고 연락을 준다. 이건 행정이 만든 일이 아니라, 도시가 스스로 따뜻해지는 일이다.”

해가 기울자, 봉안당 앞에는 마지막 향 연기가 길게 피어올랐다. 노을빛이 하얀 위패를 스치고, 참석자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누군가는 손을 모아 기도했고, 누군가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누구도 큰소리로 울지 않았지만, 그곳엔 분명한 ‘사랑의 언어’가 있었다.

그날 용인평온의 숲은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온기 속에서 다시 태어난 ‘기억의 도시’였다.

세계로컬타임즈 / 이숙영 기자 pin827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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