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수필] 남태평양 연안
민순혜
joang@hanmail.net | 2022-02-02 19:42:48
남태평양 연안 수필가 민순혜
벌써 12월이다. 나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오래전 사이판으로 여행을 갔던 때가 떠오른다. 겨울 휴가차 친구들과 함께 떠난 여행이었다. 우리는 휴식을 하기 위해 편하게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선택했다. 시간을 절약하려고 밤늦게 이륙하는 항공편을 이용했다. 이튿날 새벽 2시경 사이판 국제공항에 착륙하여 졸린 눈을 비비며 입국 심사대로 걸어 나오는데 머리 위 천정에서 윙윙 소리가 났다. 대형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살갗에 와 닿는 공기도 무덥고 습했다. 나는 문득 손에 들고 있는 털장갑과 무스탕 코트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한국에는 때마침 내린 폭설로 인해 전국 곳곳의 교통이 두절되는가 하면 서울에서 김포공항까지 가는 데만도 차를 몇 번씩 갈아타야 했던 걸 생각하면 갑자기 맞은 더위가 낯설었다. 더욱 공항 건물은 벽면이 없이 큰 기둥만 서 있는 데다, 내부는 칸막이로 각 구역을 구분해서 마치 문명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 온 듯하여 신기하기조차 했다.
우리 일행은 공항을 빠져나와 현지 가이드와 미팅한 후 그의 안내로 호텔로 가는데 그 어디에도 가로등이 없었다. 신호등도 안 보였다. 그때만 해도 사이판은 태초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내가 늘 그때를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튿날 우리는 정글 투어용 지프를 타고 정글 투어를 갔다. 정글은 작은 야산으로 열대 갈대랑 야자수가 서로 엉키듯이 늘어서 있는 무성한 원시림이었다. 사이판에서 가장 높다는 타포초산이었다. 산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정글 숲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파도가 지나가듯이 한쪽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게, 마치 산이 누웠다가 일어서는 것 같았다.
섬 주위는 코발트 빛의 아름다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에 물감을 풀어놓은 듯 하루에도 일곱 번씩 색깔이 변한다는 신비로운 바다이기도 했다. 사이판은 제주도의 약 10분의 1 면적으로 어디에서건 바다가 보였다. 우리는 다시 지프를 타고 정글 내에 위치한 ‘열대식물원’으로 갔다. 식물원은 넓은 평원으로 세계의 아름다운 꽃들이 길러진다고 한다. 꽃밭 옆에는 야자수 숲이 즐비하고 이어 안시리움 오솔길에는 벤치가 있어서 앉아 쉴 수도 있었다. 그 밖에도 난원, 빈랑나무숲, 카틀레야 가든, 등 안으로 들어갈수록 이름도 희귀한 많은 숲속길이 나왔다. 산허리를 감고 있는 듯한 수많은 양란 층 너머로는 코발트 빛 남태평양 바다가 비취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식물원 소속 전문 가이드의 설명을 뒤로 한 채 팜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라면을 튀길 때 쓰인다는 팜나무 열매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린 팜나무 숲을 걸어보고 싶어서였다. 숲사이로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오솔길을 걷고 있는데 중국 사람인 듯한 한 청년이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내 카메라를 내밀면서 한 장 찍어달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그는 빙긋이 웃더니 "저도 한국 사람입니다." “아, 네, 실례했어요.” 그는 ‘제이’라고 이름을 말하면서 자신을 단지 중앙지 ‘기자’라고만 소개하였다. 그는 친구와 둘이 올 계획이었는데 친구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혼자 왔다면서 어려움이 많다고 호소했다. 그의 숙소가 근처여서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랑 어울렸다. 이튿날 마나가하섬(Managaha Island)에 갈 때도 물론 그도 같이 갔다. 그는 여행사 항공 팩 상품으로 항공과 호텔만 예약하고 온 터였다.
마나가하섬에 갈 때는 바닥이 유리로 되어서 바닷속이 훤히 다 보이는 보트를 타고 갔다. 멀리 코발트 빛 바다 한가운데 마나가하섬이 떠 있는 듯이 보였다. 선착장에 하선하자 해변에는 흰 모래밭이 수정처럼 빛나고 있었다. 섬 둘레가 1.5km 정도밖에 안 되어 걸어서도 15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는 작은 섬이라고 했다. 그러나 열대 수목이 우거지고 순백색의 백사장에 둘러싸인 섬에서는 각종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고 휴식 시설도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제이는 해양스포츠에도 능한지 스킨스쿠버를 하겠다면서 내게 카메라를 맡겼다. 검게 그을러서 건강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해변 위 야자수 그늘에 타월을 깔고 엎드려서 파도가 쉴 새 없이 부서지는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詩를 썼다. '마나가하섬 기행. 1' 이때 쓴 시는 사이판을 아름다운 여행지로 알리는 계기가 되어 해당 여행사에서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여행은 내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다. 국내 여행도 물론 그렇지만 특히 해외여행은 기후나 지형, 문화, 풍습 등이 우리와는 많이 달라서인지 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청량감을 주곤 한다. 더욱 혹한에 떠나 온 열대지방 천혜의 휴양지 사이판은 그 어느 곳보다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숱한 사람들… 어떤 사람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그 후 영영 못 만나도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제이는 물론 후자에 속한다.
제이가 이끄는 대로 그를 좇아서 바닷속 비경인 산호초를 구경했던 것은 정말 잊고 싶지 않은 멋진 추억이다. 사실 제이와 나는 사이판의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선지 금방 친해졌다. 이것저것 두서없이 말하다가도 저 멀리 파도가 밀려오다가 방파제처럼 둘러쳐진 산호초에 부딪쳐서 하얗게 포말을 그리며 다가올 때는 그 광경에 넋을 잃은 채 서로 말없이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그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이판에서의 이틀간은 제이와의 추억뿐이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제이는 명함을 내게 주었다. 그러나 나는 돌아 나오면서 그가 준 명함을 휴지통에 버렸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은 그저 그때의 좋은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제이의 생각은 그리 쉽게 잊히지 않았다. 아름답던 섬 경치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후에도 몇 번 더 사이판에 갔지만, 처음에 느꼈던 그 태초의 신비로움은 더 느껴지지 않았다. 세계적인 휴양지인 그곳은 그사이 현대적인 빌딩들이 높이 건축되어서 그저 여느 도시와 크게 다를 게 없는 것이 그 어디에서도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제이의 흔적도 없었다.
12월, 이제 눈(雪)이 올 게다. 그 겨울처럼 폭설이 올 테고. 나는 따뜻한 곳을 찾아 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사이판에 가고 싶다. 순백색의 긴 해변 야자수 그늘에 누워 먼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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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민순혜.
대전 출생. 2010년 '시에'로 등단. 수필집 '내 마음의 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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