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정릉골, "예술이 붙잡은 마지막 골목길... 정릉골 인상 展"

유기호 기자 / 2025-11-14 08:34:12
- 재개발로 사라지는 산촌 마을의 기억… 성북 작가 23인이 그린 ‘삶의 흔적’
[사진제공= 성북구 정릉 작가]

[세계로컬타임즈]  서울 성북구 국민대학교 뒤편 정릉동 757번지 일대, 이른바 ‘정릉골’. 서울 도심에서 드물게 남아 있던 산비탈형 산촌 마을이지만, 재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수십 년 이어온 공동체의 자취가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 좁은 골목과 비탈진 돌계단, 낡은 슬레이트 지붕은 하나둘 철거되고, 그 자리를 콘크리트 구조물이 채우는 중이다.

1950년대 6·25 전쟁 이후 피란민과 서민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정릉골은 오랫동안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렸다. 도시화 이전의 풍경, 이웃끼리 삶을 나누던 공동체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개발이 속도를 내면서 이 흔적들은 더 이상 오래 머물 자리가 없어졌다.

바로 이 변화의 현장을 붙잡기 위해 성북 지역 미술단체 ‘성북의 빛’ 소속 작가들이 붓을 들었다. 그리고 그 기록의 결과물이 바로 이번 전시 '사라지는 마을 정릉골 인상'전이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다. 예술가들은 오래된 담벼락, 비탈진 골목, 마을 어르신의 주름진 얼굴, 삶의 흔적이 배인 장독대와 좁은 골목의 빛까지 캔버스 위에 옮겼다. 유화, 수묵화, 판화,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표현된 정릉골의 모습은 ‘사라짐’이 아닌 ‘기억의 복원’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한 작가는 “철거된 집터 위로 먼지가 날릴 때마다, 마치 어떤 생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며 “그 순간을 기록해 두지 않으면 정릉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질 것 같았다”고 말했다.

작품 대부분은 인간과 삶에 초점을 맞춘다. 낡았지만 견고한 돌담, 매일 올라야 했던 가파른 계단, 햇빛이 겨우 들어오는 좁은 골목길, 이곳 주민의 일상을 구성한 풍경들이다. 작가들은 변화의 속도를 예민하게 감지하며, 그 공간의 온도와 감정의 층위를 화폭으로 끌어냈다.

전시는 오는 11월 18일부터 29일까지 성북예술창작터에서 열린다. 23일(일)과 24일(월)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예술적 시도가 아니라, 도시 변화의 기록자(Achivist)로서 예술의 역할을 부각한다.

그리고 도시재생·재개발이 빠르게 진행되는 서울에서, 사라지는 마을의 형태는 이제 흔한 풍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공간에 살던 사람들의 시간까지 사라져도 되는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정릉골은 그 질문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산비탈을 따라 늘어선 작은 집들, 마을을 가로지르는 계곡과 돌계단, 서로를 부르며 살던 주민들. 이러한 삶의 자취가 도시계획과 속도의 논리 속에서 사라질 때, 예술은 그 빈자리를 기록으로 채운다.

[사진제공= 성북 작가]

이번 전시에는 총 23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강기욱, 권태이, 김정순, 김종수, 김흥태, 남영록, 남원구, 류은자, 박성자, 박주현, 방국진, 신영희, 신은희, 심계효, 심인혜, 윤현덕, 이문, 이신명, 이안자, 이은희, 이정아, 정란숙, 최성규 등이다.

각자의 시선과 화풍으로 담긴 정릉골은 마치 한 마을의 다채로운 기억을 모아 놓은 거대한 구술사(oral history)처럼 구성된다. 어떤 작품은 골목의 소음을 세밀한 붓질로 담아냈고, 어떤 작품은 바람에 날리던 먼지와 햇빛의 결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설치 작품은 무너지기 직전의 담장 구조를 재현하며 재개발의 현실성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어 정릉골의 풍경은 사라질지 몰라도,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존재한다. 예술가들은 바로 이 지점을 포착했다. 이번 전시가 주는 감동은 단지 ‘옛 마을의 풍경이 아름다웠다’는 감상이 아니다. 오히려 “도시는 언제든 변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결코 단순한 풍경으로 치환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또한, 정릉골을 기록한 예술가들의 붓질은, 빠르게 사라지는 도시의 한 조각을 붙잡아 두려는 저항이자 애도이며, 동시에 다음 세대에게 남기는 기억의 장치다. 도시는 늘 성장과 속도의 논리로 움직인다. 그러나 그 속에 사람과 공동체의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종종 잊혀진다.

이번 전시는 재개발이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과 최대한의 기록을 보여준다. 마을이 사라지고 건물이 들어서도, 예술을 통해 남겨진 기억은 또 다른 사회적 자원이 된다. 정릉골의 마지막 계단과 골목을 바라본 23명의 시선은, 결국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지워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사진제공= 성북 작가]

세계로컬타임즈 / 유기호 기자 pin827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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