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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작가·성균관대 초빙 교수 |
놀라운 정책으로 천하 사람들을 끌어모은 나라가 있다. 약 3천년전 춘추시대 제나라다. 탁월한 정치를 베풀어 물 흐르듯 사람들이 자연스레 몰려와 파도를 이룬 곳이다. 관중(管仲)과 환공(桓公)의 제(齊)나라는 춘추(春秋) 초기 사람들에게 꿈의 나라였다.
그러기에 관중은 공자도 극찬한 인물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관중이 없었다면 천하 사람들이 야만 상태로 남아있었을 거라고 했다. 관중은 중국의 정치문화를 일군 인물 중 하나다. 그의 정책들은 <관자(管子)>라는 방대하고 걸출한 책으로 남았다.
엄청난 반전이다. 그래서 관중하면 ‘바늘과 실’처럼 포숙아가 떠오르고 그들의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古事)로 남았다. 관중은 공자의 제자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직설적인 성격의 자로(子路)뿐 아니라 온화한 자공(子貢) 또한 공자에게 관중의 배신을 성토한다. 주인을 따라 죽지 않았거니와 도리어 자신의 주인을 죽인 환공을 도왔으니 어질다[仁]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관중의 뛰어난 외교술과 평화정책을 들어 그를 칭찬한다. 공자의 단호한 대답을 들어 보자. “환공(桓公)이 제후(諸侯)들을 규합하되, 무력(武力)을 쓰지 않은 것은 관중(管仲)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 사람만큼 어질겠는가? 누가 그 사람만큼 어질겠는가?” 관중의 공효(功效)에 집중한 평가이다.
누구를 배신하고 말고의 작은 사건에 매달릴게 아니다. 지혜로운 정책으로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보존하고 아껴주었으니 그만한 어짊(仁)이 어디있냐는 반문이다. 회맹(會盟)이라는 국제정상회의를 통해 춘추시대 열국들을 규합한 관중의 현명함을 공자는 인정했다. 경제원조로 시작해 주변국과 동맹을 맺어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이끈 그의 공적을 공자는 놓치지 않았다. 만약 관중이라는 명재상이 세상에 나지 않았다면 당시 사람들은 오랑캐(야만인)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칭송하기까지 한다.
관중은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배경도 별로이고 양심도 볼만한 게 없어 보이는 그에게 한 가지 따른 것은 친구복이었다. 우리는 관중의 친구복을 관포지교로 기억한다.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동업자를 이해해 준 사람, 전장에서 도망한 비겁한 군인을 보듬어 준 사람. 마음 깊이 관중을 아껴준 그는 바로 포숙아였다. 게다가 포숙아는 죽을 처지에 놓인 관중을 환공에게 천거한다.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 준 것이다. 관중은 친구의 기대에 부응하며 40여년 동안 제나라를 부국안민으로 이끈다.
훗날 관중은 포숙아와의 만남을 술회하며 자신의 부끄러운 행적을 낱낱이 고백한다. 포숙아에게 관중은 문제투성이 ‘차단대상 1호’가 되기에 충분했지만 어려서부터 관중을 지켜본 포숙아는 그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이해했다. 이익 분배의 불공정은 관중의 가난함으로, 전장에서의 도주는 연로한 모친의 부양으로 속깊게 알아주었다. 관중의 쉽지 않은 인생의 족적이 지혜와 포용의 정치로 이어질 가능성을 포숙아는 예측했고 그것은 적중했다.
춘추 최고의 제나라를 만든 것은 관중이었다. 하지만 삶의 질곡을 위태롭게 헤쳐가던 외롭고 의기소침한 관중을 세워주고 만들어 준 사람은 포숙아다. 그것은 관중의 고백에 보인다. “나를 (세상에)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고 (세상에서) 나를 알아준 분은 포숙아(鮑子)이다” 문득 포자(鮑子)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