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탐방단이 1일 블라디보스토크 중앙광장(무명 혁명전사 광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글·사진 세계일보 이우춘 조사팀장] 세계일보 조사국은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극동러시아에 위치한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및 하바롭스크 지역의 독립운동 유적지을 답사했다.
‘제5차 조사위원 러시아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은 조국통일의 정론지 세계일보가 남북통일에 기여하고 민족정기를 발양하기 위해 실시하고 있는 해외 역사 기행으로 전국 조사위원 59명이 함께했다.
◆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동방 정복’ 반영한 도시
탐방단은 지난달 31일 양양국제공항에서 동해바다를 1시간 반 가량 비행해 늦은 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했다. 러시아어로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을 지배하다’라는 의미로 이름부터 러시아의 ‘동방 정복’, ‘동진(東進)’을 반영한 도시다.
1일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1858~1920)이 우수리스크로 이주하기 전 1919년까지 거주했던 아르바트 거리의 건물을 답사한 후, 해양공원으로 불리는 개척리의 구한촌을 찾았다. 한인들이 1860년대 두만강을 건넌 후, 대규모로 정착한 곳이다. 하지만 1911년 제정 러시아는 콜레라 창궐 등의 구실을 들어 한인들을 산기슭의 신한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어 독립운동가들에게 만남의 장소였고 금각교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독수리전망대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앙광장, 개선문도 둘러 봤다. 무명혁명전사 광장으로 불리는 중앙광장은 150년 전 블라디보스토크가 탄생한 장소로 1958부터 1991년까지 철의 장막시대에 해군사령부가 자리한 탓에 지금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역과 국제항구가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 루스키섬, 과학, 교육, 기술 클러스터이자 휴양지
루스키섬으로 향했다. 먼저 동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바트리나 곶을 찾아 산책하며 남북통일을 기원했다. 이어 2012년 APEC을 개최하고, 올해까지 다섯 차례 동방경제포럼이 열린 극동연방대학 캠퍼스 본관을 둘러봤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가 2012년 신동방정책을 표방하며 야심차게 투자한 루스키섬은 극동연방대학을 중심으로 과학, 교육, 기술 클러스터이자 휴양지이다.
◆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2일은 신한촌에서 시작했다. 신한촌은 많은 한인단체들이 조직된 곳으로 재외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가 연해주에서 1919년 3월 17일 수립될 수 있는 기반이 된 곳이다. 뒤이은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세 개의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11일 상하이의 임시정부로 통합됐다. 국권 회복을 위한 굴곡진 역사의 현장에 세워진 신한촌 기념비에 헌화하고 독립투사들의 얼을 기렸다.
◆ 한인 20여만 명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우수리스크로 향하는 길에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이주를 당한 라즈돌리노예 역에 들렀다. 1937년 9~10월을 정점으로 국적 없는 20여만 명의 한인이 중앙아시아로 완전히 추방된 곳이다. 6천km를 이동하는 열차 화물칸에서 40여일 휘몰아치는 시베리아 삭풍에 절반 이상이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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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탐방단이 2일 방문한 우수리스크시 최재형 선생 고택의 독립운동기념관 모습 |
◆ 독립운동의 페치카(난로), 최재형 선생
우수리스크에 도착해 독립운동의 페치카(난로) 최재형 선생이 일본군이 일으킨 ‘1920년 4월 참변’으로 피살되기까지 1919년부터 거주했던 고택에 들렀다. 올해 3월 28일 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개관한 옛집은 선생이 가난으로 11살에 가출해 러시아 선장 부부의 보살핌을 받아 성장한 후, 동의회를 조직하고 대동공보사, 대양보, 권업신문 등을 만들어 항일의식을 고취한 업적들을 전시하고 있다.
◆ 수이푼강의 보재 이상설 선생 유허비
기념관 답사를 마치고 수이푼강 강변에 자리한 보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에 다다랐다. 헤이그 밀사로 파견됐던 선생은 밀사에 대한 일제의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러시아에 망명 후, 병사할 때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돼 수이푼 강물에 뿌려졌다.
유허비에서 참배 후, 발해국 솔빈부의 성터를 둘러보고 안중근 의사와 의암 류인석 선생 기념비가 있는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를 방문했다. 강제이주에서 되돌아온 수만 명의 한인들이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 기념관’과 ‘고려인문화센터’를 중심으로 다시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셋째 날 일정을 마무리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시베리아 대륙횡단 열차에 올랐다. 객차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12시간 남짓 지난 3일 아침 하바롭스크역에 도착했다. 역을 나서자마자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동상이 눈길을 끈다. 하바롭스크라는 도시명이 유래된 하바로프는 레나강과 아무르강을 탐험하고 러시아의 영토확장에 기여한 탐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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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방단이 2일 우수리스크에 있는 헤이그밀사 이상설 선생 유허비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
◆ 총길이 2,824㎞ 세계에서 8번째로 긴 아무르강
먼저 탐방단은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을 둘러싼 2차 세계대전 전몰자 비문에서 소련군으로 참전해 전사한 한인들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어 극동에서 가장 규모가 큰 프레오브라젠스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감상했다. 이어 꼼소몰 광장 앞의 선착장에서 총길이 2,824㎞로 세계에서 8번째로 긴 아무르강의 유람선을 1시간 가량 탔다.
유람선이 수려한 풍광의 하바롭스크시를 뒤로하고 망망대해 같은 강 가운데로 나아갈수록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의 합류지점답게 두 색깔의 강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람 후 하바롭스크 중앙시장에 들렀다. 러시아 청정지역의 기념품으로 유명한 꿀과 차가버섯 그리고 우리에겐 생소한 납작 복숭아, 멜론과 비슷한 드냐 등을 흥정하여 사서 음미했다. 시장에서 여유가 넘치는 하바롭스크 시민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 한반도 3배 크기의 영토를 얻어낸 아무르스키
마지막 날, 우초스 전망대로 향했다. 우초스 전망대 앞에는 동부 시베리아 총독을 지낸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1809~1881) 동상이 아무르강을 바라보고 있다. 총독은 태평천국의 난과 2차 아편전쟁으로 혼돈에 빠진 청나라와 1858년 ‘아이훈조약’을 강압적으로 맺고 한반도 면적 약 3배 크기의 영토를 얻어낸 인물이다.
이어 하바롭스크 향토 박물관에 들렀다. 구관과 신관으로 나눠진 박물관에서 생명 진화와 자연사 그리고 원주민인 나나이족 및 러시아인의 이주사와 생활사를 한자리에서 관람했다. 더불어 제정 러시아에서부터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연방의 역사까지 둘러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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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방단이 3일 하바롭스크역 광장의 예로페이 하바로프 동상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
◆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 당원, 알렉산드라 김
오후에 트램을 체험 한 후, 마지막 일정으로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당원인 알렉산드라 김(본명 김애림,1885~1918) 등이 1918년 9월 16일 백위군에게 처형된 죽음의 골짜기에 위치한 추모비를 찾았다. 1902년 아버지 표트르 김이 사망하고 아버지 친구인 이오시프 스탄케비치에게 맡겨진 알렉산드라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우랄산맥 일대에서 한인 벌목공들의 통역사로 일하며 1917년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공산당이 권력을 잡자 알렉산드라는 하바롭스크 소비에트의 외무위원으로 임명되어 한인사회당 조직에 힘썼다. 하지만 1918년 8월 하바롭스크를 장악한 백위군에 의해 공산당 간부들과 함께 체포됐다.
◆ 이념대립과 한반도 분단의 원인제공자 소련
탐방단은 여정을 마무리하며 한국과 러시아의 역사에 대해 조명했다. 조선은 청나라의 1654년 ‘나선정벌’ 때 원군을 파견하여 제정 러시아와 최초로 조우했다. 2세기가 지나 1858년 ‘아이훈 조약’과 1860년 ‘북경조약’이 청·러 간에 체결되면서 두만강의 끝자락을 경계로 19km이르는 국경을 마주하게 됐다.
1884년 조선은 ‘조·러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1888년 국교를 수립했다. 1896년 2월 11일 조선의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아관파천)으로 옮긴 후 긴밀한 외교관계를 정립하고자 했다. 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전승국 일본은 한국을 식민체제로 귀속시켜 1945년 태평양전쟁 종전까지 강점하게 된다. 이념의 대립과 미국·소련의 세계적 패권경쟁이 초래한 한반도의 분단에 이어 한국전쟁의 직접적 원인제공자였던 소련과의 관계는 오랫동안 냉전의 벽을 넘지 못했다.
◆ 문선명 총재와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평화회담
세계일보를 설립한 문선명 총재는 1990년 4월 11일 모스크바 크레물린궁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기치로 변혁을 꾀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만났다. 문 총재는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회담에서 한국과 수교할 것을 촉구하며 경제협력, 평화적 남북통일, 소련 내 종교자유문제 등 세계평화를 위한 제반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곧이어 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의 외교관계가 전격적으로 수립되었고,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며 한국·러시아 관계로 대체됐다.
◆ 한·러 관계, 남북통일에 기여하는 차원으로 나아가 길
러시아는 현재 남한과는 경제협력 관계를 북한과는 정치·군사적 유대체제를 유지하는 모습이다. 국가의 존재 의미를 일깨워 준 이번 답사를 끝마치며 한·러 관계가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위해 극동러시아를 공동개발하고 남북통일에 직접 기여하는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되어 가길 조사위원들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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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_기념관 겸 고려인문화센터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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