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호가 표류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국무총리에 내정하고, 비서실장에 한광옥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한광옥 국민통합위원장을, 정무수석에 허원제 전 국회의원을 임명하는 등 ‘깜짝 카드’를 꺼냈다. ‘최순실 게이트’의 폭풍을 이겨내고 국정을 다잡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문제는 박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에 야권은 물론 여권 내에서도 거센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는 점이다. 김 총리 내정자는 노무현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실장과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지낸 야권 인사다. 신임 경제부총리와 국민안전처 장관에는 모두 호남 출신인 임종룡 금융위원장과 박승주 한국시민자원봉사회 이사장을 각각 내정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사태로 흔들리는 국정을 수습하겠다며 청와대 참모진 개편에 이어 내놓은 두번째 조치다.
총리 인선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 안, 특히 비박(비박근혜)계에서도 반발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비난도 나왔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 3당은 원내대표 회동에서 임명 철회를 요구하고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부하기로 했다. 김무성 전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도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시중 여론도 부정적이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국정 정상화 방안 마련을 위한 여론 수렴차 각계 인사들을 만났다. 새누리당 지도부와 상임고문단, 시민사회 원로들을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은 뒤로 물러나고 책임총리가 나라를 운영하는 거국내각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여러 쓴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김병준 총리 카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이번 인선은 실망을 넘어 절망을 안겨주고 있다. 총체적 난국을 수습할 의지나 능력이 과연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비선실세 국정농단 파문으로 민심은 폭발 직전이다. 국민들 사이에선 하야 퇴진 목소리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박 대통령이 국민 앞에 엎드려 사죄해도 부족할 판이다. 이런 마당에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거국중립내각’ 운운하며 총리 인선을 선심 쓰듯 꺼내 든 것은 오만이고 독선이다.
김 내정자가 어렵게 국회 임명동의를 받는다 해도 단순히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에 그쳐서는 성난 민심을 달래고 난국을 헤쳐 나가기 어렵다. 청와대는 “신임총리는 권한이 최대한 보장되는 책임총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중요한 것은 박 대통령이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무엇보다 실질적 내각 조각권과 내치(內治)의 권한을 확실하게 보장해야 한다. 향후 추가 각료 인선 과정에서도 여야의 의견을 두루 듣고 거국내각에 버금가는 인적쇄신이 뒤따라야 한다. ‘무늬만 책임총리’가 돼서는 국정 수습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그 피해는 모두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대통령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는 시중 비판을 직시해야 한다.
한편 최 씨의 검찰 수사와 함께 최씨를 물밑에서 도와준 정권 핵심 실세들에 대한 소환조사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한심한 일은 최씨 등이 국정농단을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청와대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과 정호성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을 비롯한 ‘문고리 3인방’ 등의 지위와 권력이 동원된 셈이다. 국가 공적 시스템이 무너졌다고 하겠다.
문제는 안 전 수석이나 정 전 부속실장 등이 독자적 판단으로 최씨를 돕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특히 검찰은 미르·K스포츠재단의 800억원 가까운 모금 과정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진 안 전 수석을 피의자로 소환해 수사했다. 안 전 수석의 수사에서 박 대통령과의 직접적 연관성이 드러날 경우 수사의 칼날이 박 대통령 본인을 직접 겨냥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정 전 제1부속실장은 연설문과 국무회의 자료 등을 최씨에게 사전 유출한 의혹을 받고 있다. 이런 핵심 당사자와 관련한 압수수색을 가로막고서 어떻게 진상 규명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국민의 절망감을 통감한다면 박근혜 대통령 자신부터 수사를 자청해야 마땅하다.